1.
늦잠을 잤다. 한 계절 내내 자던 잠의 습관이 고작 며칠 만에 바뀔리 없었다. 청강을 결심한 과목을 포함하여 세 과목의 수업을 못들어갔으나, 석사 1,2학기 과정을 모두 경험하게 해주겠다며 L교수님이 야심차게 기획한 2학점짜리 실험 한 과목만으로 충분히 피로한 오후였다. 조교는 눈만 꿈뻑거리는 우리들에게 "알아듣겠어요?"라며 연신 대답을 강요했고, 1마이크로리터를 걸어 로딩해야하는 상황에도 내 수전증은 여전했다. EtBr이 내 DNA에 급속도로 끼어들어가 급성반응을 야기하여 이번학기를 구출해주었으면, 그런 생각만이 간절했다. 가출한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늦잠도 잘 수 있고, 낮에는 한가하며, 어른이 되어 별 스트레스도 없는 선생님"이 양해해줘야 하는 위급상황이라고 나에게 짜증내던 악마와, 열한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도착하여 열두시가 되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여고생의 과외수업까지 마치고 나니 또 하루가 끝났다. 내일 실험을 위한 프로토콜 조사, 이번주가 마감인 레포트가 두개, 토요일까지 풀어야하는 물리문제, 영어과제와 독서모임을 위한 준비. 연애도 해야하고, 대전도 가야하고, 졸업도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대학원도 가야하는데. 스케쥴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당분간 주력해서 읽어야 하는 책은 <Thinking and Deciding>이다. 웃어야하나 울어야하나. 새벽 2시, 스콘을 먹으며 계대배양 프로토콜을 읽다가 갑자기 내일 A교시 물리실험이 생각났고, 나는 좀 한탄하고 싶어졌을 뿐이고.
2.
<20대에 연애횟수 3회가 적당한 이유> 라는 가십기사를 읽었다. 이런기사야 다 그렇고 그러하니 그러하지만(뭐라는거니;;), 어떤 댓글은 나를 푸훗, 웃게 했다. "괜찮아, 9개월 남았어, 3번쯤 문제없어!!" 이런거. 아직 나의 20대는 몇 년 남았고, 나는 3회를 초과한 연애를 했으니 여유있어도 되는 건가, 흣 //ㅁ// 대개는, 연애 횟수가 얼마나 되든, 오래도록 가슴에 새기는 사람은 한두명쯤인것 같다. 어떤 날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야 조금씩 다들 있지만, 그냥 그 세월들 때문에 내 삶이 흔들리고 틀어졌다고, <연애시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잃어버린 채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것은 운명이지 않았을까, 변명하고 싶어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명해지고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존재하는 그런 연애.
3.
어떤 사람들은, 그 연애가 마음에 새겨놓은 글씨를 오래도록 지우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살아간다. 차마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한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다가 찬바람이 부는 어느 계절 뜻하지 않게 추억을 밟고, 사소한 안부전화 한 통화에도 휘청휘청거린다. E도 그랬다. 선배 남자친구 있어요? 언니 왜 연애 안해요? 혹시 성적코드가 우리랑 다른거 아니야? 점점 늘어나는 질문에 Yes, or No 조차 답변하지 않고 싱긋 웃기만 하던 여자. 친하지도 않았던 어느날의 불편한 술자리, 나따위가 무슨 사랑을 하겠냐고, 사랑따위, 나따위, 사랑따위, 나따위, 그렇게 갑자기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술주정하던 여자. 그러던 그녀가 누구를 만나고 있다한다. 겁이나서, 확신이 없어서, 그래도 왜인지 놓치긴 싫어서 몇가지 규칙을 합의해 만나고 있다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규칙이란 '먼저 연락하지 않겠다, 쎅스는 하지 않는다, 당분간 주변에 알리지 않는다.'를 포함한 몇 가지였다. 유치하게나마 편가르기를 하자면 나는 물론 E편에 서겠지만, 그런 내가 봐도 참으로 이기적인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차마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벌받을꺼야, 당신!!! 흐흣. 그리고 우리의 대화.
( 졸업 좀 시켜줘 ;ㅁ ; ) 님의 말 :
엄훠, 심심하게 ㅋㅋㅋ
( 별로 그래보이지도 않는데, 킁킁 ) 님의 말 :
ㅋㅋㅋ
( 별로 그래보이지도 않는데, 킁킁 ) 님의 말 :
그런데......
( 별로 그래보이지도 않는데, 킁킁 ) 님의 말 :
자꾸 좋아져
( 별로 그래보이지도 않는데, 킁킁 ) 님의 말 :
그게 문제야
( 졸업 좀 시켜줘 ;ㅁ ; ) 님의 말 :
응응,
( 졸업 좀 시켜줘 ;ㅁ ;) 님의 말 :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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